구르스키에 관한 이야기
구르스키의 사진은 이곳저곳에서 90년대 후반부터 제눈에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적지 않은 크기의 사진들은 엄청난 위암감을 주긴 하였지만
그가 누구인지, 어떤 접근 방법인지를 모르면서
단순히 크기에 의한 압도와 섬세한 디테일로 보는 사람을 주늑들게 만들었습니다.
책에서 접해지는 사진들은 나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게 만들었지만 한번 보았던 사진의 느낌만은
책이 아무리 크게 인쇄가 되어 진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이즈인지를 적어 놓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그 설레였던 느낌을 언제나 가지며 바라보게 되는군요.
<노피곰닷넷 이원균>
구르스키라는 이름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러시아계인줄로 얼마전까지 알고 있었고,
단순히 너무 정적인 사진만을 찍어 놓았던 그의 세계는 21세기에 맞아보이는 현대사진은 아닌걸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크기에 앞도 당한후 느껴지는 섬세한 디테일들은 무어라 표현할수 없는 감동을 저에게 전해주던군요..
내가 느끼는 그것이 그가 노리던 그것과 같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뭐라해도 그의 사진을 보면 뿌듯한, 뭔가 아주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난듯한 마음을 가지게 되지만
현실로 돌아와 나는 왜 그렇게, 우리는 왜 그렇게 작업을 못하는지 궁금해지기는 합니다.
그것이 베허부부 식의 훈련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지요.
아참, 구르스키는 베허 스쿨에서 사진을 배웠읍니다. 전 베허부부를 별로 라고 생각해서
나의 작품집 컬렉션에서는 전혀 취급하지 않았었습니다.
오가다보면 많은 사진집들이 존재하였지만 나는 그 들이 찍은 물탱크와 집들이 웬지 싫었습니다.
너무 폄협되었던 시각인지는 모르지만 그 부부의 사진속에는 현대적인 현대 사진들과는 거리가 있게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진동선 선생님은 구르스키의 사진을 잔더의 연장 선상으로 보는것 같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독일식 신즉물주의의 연장으로의 구르스키와 베허부부를 보게 되었읍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랭거 패취와 아구스트 잔더를 베허 부부가 시각적 사상적 연장을 시켜
그 결과물이 나타나진것이 구르스키와 로프의 작품이 되어진것 같습니다.
좀 더 작품의 본질에 접근이 된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처음에 본것과 시간이 지나고 본것과 또 더욱 많은 시간이 경과한후에 보는것은 많은 다른 생각을 가지도록 만듦니다.
이것이 알음과 관련이 있을지도, 또는 경험에 의한것일지도 모릅니다만 구르스키의 사진은 앞으로 계속 주목을 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노피곰닷넷 이원균>
제 472호 2001.3.28
대형 컬러 사진으로 보는 세상
독일 사진작가 구르스키, 평범한 소재에서 평범하지 않은 그 무엇을 찾으려고 한다
Peter Plagens 기자
독일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45)는 007 영화속의 첩보원 피어스 브로스넌처럼 꼭 오므린 입술에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도 007처럼 “구르스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요”라고 할 것 같다. 중견 사진작가 구르스키의 회고전이 최근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 개막됐다. 실제로 그는 뛰어난 스파이가 그렇듯 조용하고 분명한 자신감을 갖고 있으며 그의 직업도 실은 첩보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항상 5×2.178 7인치 감광판을 사용하는 카메라로 작업한다. 말하자면 즉흥적으로 반응할 수가 없다.
원하는 내용을 주의깊게 생각해야만 한다. 나는 시각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오랫동안 생각한 후 준비에 들어간다.” 구르스키는 그처럼 냉철하고 섬세한 접근 방식을 바탕으로 지극히 선명한 대형 컬러 사진을 예술계의 최고 인기상품으로 만든 일단의 사진작가들 중에서도 정상의 위치에 서게 됐다. 젊은 수집가들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미국의 소호에 이르기까지 대형 컬러 사진들을 사려고 안달이다. 그 사진작품들은 첨단기술을 구사하며,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처럼 물질 생활에 대한 묘사가 흥겹게 담겨 있다. 구르스키, 그리고 역시 독일인인 토마스 루프의 사진작품들에 대한 수요 증가로 작품 가격도 가장 인기있는 현대 회화 작품과 같은 수준인 수만달러대로 치솟았다.
구르스키는 양친이 모두 상업 사진가였다. 그러나 그는 뒤셀도르프에 있는 전위적인 미술학교 쿤슈트아카데미를 다녔다. 세계적인 화가 안셀름 키에퍼와 지그마르 폴케를 배출한 유명한 학교다. 구르스키는 베른트 베허와 힐라 베허에게서 배웠는데 그 지방 고유의 건축물을 담은 그들의 흑백 사진들이 1970년대 많은 화랑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자 학생들은 스승들의 작품 제작 방식을 열렬히 답습했다. 그것은 바로 건물이나 인물의 초상처럼 평범하지만 풍부한 주제를 선택해서 그 모든 세부를 포착하는 것이다. 구르스키는 그외에 색깔, 다양함, 현대 세계가 우리의 눈에 제공해주는 그 모든 것에 대한 순수한 경이감을 추가했다. 구르스키는 자신의 주제를 찾기 위해 항상 여행했는데 노동절을 기념하며 흥겨워 하는 사람들, 발코니가 끝없이 펼쳐지는 한 상하이(上海) 호텔의 중앙 공간, 도쿄(東京)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등 종종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복잡한 것들이었다.
구르스키는 반대로 지극히 단순한 경향도 보인다. ‘라인’(1999년)에는 그의 집에서 0.4km 떨어진 곳에서 흘러가는 라인강이 담겨 있다. 그는 그 강가에서 매일 조깅을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사진의 이미지가 형성되기까지 3년이 걸렸다. “푸른 하늘일 때 찍으면 안되지. 수면이 푸르게 될 텐데, 수면은 잿빛이어야 하거든”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또 자신의 거추장스러운 카메라를 고정시킬 특수 받침대를 제작해야 했다.
구르스키는 스캐너 작업과 기존의 필름 인화 작업을 병행하며 작품에 점차 디지털 수정을 가미했다. 그는 한번에 한 픽셀씩 수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결과는 다양하다. 두채의 황량하고 단순한 창고 건물들이 합성된 ‘토이저러스’(1999년)는 인공적으로 세워진 환경의 비인간화에 대한 강한 비평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펼쳐지는 주주들의 회의를 담은 성대한 환상은 그 자신이 주장하는 현실감이 컴퓨터에 너무 많이 희생됐다.
구르스키展을 기획한 MoMA의 큐레이터 피터 갈라시는 이렇게 말했다. “사진이 지닌 한가지 문제는 사람들이 모두 매일 수백장의 사진을 보기 때문에 다들 사진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은 작은 직사각형의 흑백사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사진계에서는 [대형 컬러 사진]이 멋지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언제나 깨닫게 될지 궁금해했다.” 물론 모두 구르스키만큼 모방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계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돈다. “걸작을 만들 수 없다면 붉게 만들어라. 그리고 붉게 만들 수 없다면 크게 만들어라.” 구르스키는 사진들을 크게, 때로는 약간 붉게 제작했고 그 작품들은 거의 항상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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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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