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에 있었던....김근표라는 분의 전시 사진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갤러리 오투에서 열린 조그마한 전시였지만,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나는 사진입니다.
그해 본 전시중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뒤로 작가가 어디서 뭘 하는지는.....알 수가 없습니다.
아시는 분 리플 부탁합니다.
http://home.freechal.com/~zabellocq/s.zip
여러....알려진 작가들이야, 자료를 뒤지면 많진 않아도 찾을 수 있으니까 그럭저럭 괜찮습니다만, 사진은 좋은데 거의 무명에 가까운 분들도...생각해 보니 꽤 많았던 것같습니다. 한국 작가들을 중심으로 괜찮은 무명분들을 조금씩...올려볼 작정입니다.
아래 글은 전시를 본후 홈피에 제가 쓴 글과 팜플렛/네오룩 메일에 쓰여 있던 전시 소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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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저번주 토요일 김근표 사진전을 보았다.
메이플도프같은 전략이 아닐까 생각 되었다.
갤러리에 걸리는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고찰.
찍혀진 이미지들은, 동네 꼬마들의 장난/물놀이를 놀자! 란 의미에서 사진찍은 것들의, 갤러리적 업그레이드 어플리케이션(한국에서만 쓰일 수 있는 단어)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신 정수천님의 말처럼, 텍스트는 말이없고 모호함을 참지 못하고..............등등의 답답한 말들로서 해결될 수 있는 사진들은 아니었다.
석유자체는 흔하지만, 그것을 땅속에서 발견해 내기는 어려운 것처럼 김근표님의 사진들도 아마 새로운 이미지의 맥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이들 노는 사진은 흔하지만, 고급스럽진 않았다.
적어도 한국에선.
p.s : 내가 사진하면서 본 오리지널 프린트중 다섯 손가락 안에드는 퀄리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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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는 말이 없다.
● 원래 사진이미지는 스스로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단지 사진가가 묻는 말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꾸만을 할 뿐이고 자신을 보는 수많은 사람이 말을 걸어야 그저 조금 입을 열 뿐이다. 그래서 사진이미지는 중력에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무중력의 상태로 항상 미끄러지고 부유하는 의미의 파편들 일 뿐이다.
● 그런데 우린 사진이미지들이 우리의 의미화의 코드들 속에서 길들여지지 않고 항상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것을 잘 참지 못한다. 그래서 말이 없는 사진이미지를 말하게 만들려고 우린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해 왔고 그래서 사진이미지는 언어적인 환원을 항상 당해왔다. 물론 들뢰즈가 푸코를 이야기하면서 말했듯이 담론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 사이에서 담론적인 계열화가 우선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시각적인 것이 담론적인 것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들뢰즈는 그의 책 '감각의 논리'에서 베이컨의 회화이미지를 분석하면서 '만지는 시각'이라는 개념을 생산해냈고 '시네마'를 통해서는 영화이미지를 시간-이미지와 운동-이미지라는, 서사를 통해 영화이미지를 분석하는 방식과는 다른 시각적인 것 자체의 문제를 거론했던 것이다.
● 사진이미지가 읽혀지는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들을 발생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현실로부터 잡아 뜯어낸 사진이미지의 프레임이 읽혀지는 그 맥락의 중간에서 그 맥락을 고정시키는 접착의 효과를 내는 것은 단지 일시적이다. 그 맥락의 서사로부터 봉합되어진 사진이미지의 프레임은 중간과 중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긴 한다. 이야기, 서사의 차원에서.... 그러나 사진이미지의 시각적인 것은 그 맥락의 서사를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맥락과 사진이미지가 연결되는 그 지점의 틈을, 간극을 더욱 벌어지게 만들어 버린다. 왜냐면 맥락의 문제이전에 사진이미지 자체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이 공존하는 모호함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 우린 모호함을 참지 못한다. 시각이미지 그리고 사진이미지 역시 일정정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야만 소비가 가능해지기에 우린 사진가가 던져주는 의미화의 코드를 받아 쥐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의 맥락에 의해 일정정도 사진이미지를 의미의 영역에 집어넣기도 하고 비평가가 분석해 놓은 글을 통해 의미를 건네 받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사진이미지의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카오스의 영역으로 밀어내어 버리고 사진이미지를 말해질 수 있는 것으로만 만나고자 한다.
● 사실 작년에 처음 진행중인 이 작업을 보았을 때,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도대체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사진가가 현실 속에서 잡아 뜯어낸 그 순간이 도저히 서사 속에 봉합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이란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던 걸까.
● 사진이미지는 현실에서 뜯겨 나오는 순간 현실과는 다른 층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물론 현실과 관계 맺는 지점도 분명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 은폐된 것들-말해질 수 있으나 말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말해져야만 하지만 사진이미지는 그것과는 또 다른 내부 속의 외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작업을 보면서 들었다.
● 이 작업을 보며 사진이미지의 모호함을 대면하고 즐기면서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사진이미지는 말이 없다.......
■ 정수천·사진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