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게레오타입의 환상과 현실

  
I 잠상의 발견과 다게레오타입

II 가속 감광물과 노출시간

III 이중렌즈와 다게레오타입

IV 고뎅과 다게레오타입

V 다게레오타입의 환상


최초의 사진 이미지들은 사진의 탄생 연도로 간주되는 1839년보다 훨씬 앞선 18세기 후반에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최초의 사진판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니엡스의 금속판이나 다게르의 은판이 아니라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된 단순한 종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종이 이미지는 탈보트의 칼로타입(calotype)과 같이 단시간에 색이 변하지 않는 완전한 사진 이미지가 아니라 마술과 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없어지는 하루살이 이미지였다. 현존하는 문헌상의 기록들(차후 19세기 중엽이나 20 세기초에 서술화되고 역사화된 기록)도 18세기 말경 당시 많은 박식한 사람들이 이러한 마술적인 이미지를 이미 알고 있었고 또한 몇 몇은 실지로 이러한 기술을 공식화하려고 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진술은 앞서 언급한 추론들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 더욱이 당시 이미지 고착(정착)문제를 제외하고는 사진 발명에 필요한 거의 모든 기술들이 이미 순수과학 분야에서 화학적으로 또한 광학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상황이었다. 그때 사진발명의 결정적인 동기는 당시 산업혁명과 더불어 전파 매체에 있어 일종의 과학적 발명으로 간주되는 새로운 이미지(석판화)의 복제 기술에 관계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사실상 돈벌이의 수단으로 인식되었음과 동시에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맹이었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사진의 발명은 전파와 보급이라는 실용적인 차원에 관련했다. 최초의 사진 발명가를 흔히 니세포르 니엡스(Nicéphore Niépce)로 언급하지만 사실상 그는 차후에 밝혀진 사진발명의 결정적인 공로자로 간주될 뿐이고 그의 성과는 엄밀히 말해 그에게 이미지 복사 기술을 가르쳐 준 그의 형 클로드 니엡스(Claude Niépce)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진 발명을 1839년으로 규명해 놓은 것은 확실히 어떤 편파적인 역사적 시각으로부터인데 엄밀히 말해 이러한 역사적 년도는 단순히 사진발명을 천명한 공식적인 "선언"에만 관계할 뿐이다.

비록 사진 발명의 전조를 알리는 많은 실험적인 복사 이미지들(화학적 방법에 의한)이 이미 18세기 말경에 비공식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추측함에도 불구하고 여하간 처음으로 현실의 분명한 복사 이미지는 종이가 아니라 금속판 즉 다게레오타입의 은판 위에 나타났다. 우리가 흔히 진정한 사진 발명가를 다게르(Jacque-Mandet Daguerre)로 간주하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가장 큰 이유로는 단지 니엡스로부터 전수된 사진 발명의 완성자라는 사실보다 사진발명의 결정적 요소인 잠상의 발견이라는 역사적 업적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보여진 역사는 19세기 사진의 모든 역사적 기준이 되는 기술적 발견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실이기도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니엡스와 다게르의 공조계약 이후 다게르의 중요한 기술적 발견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첫 발견은 니엡스가 예전에 금속(주석)판에 감광물로 사용한 옥화은(Iodure d'argent)이 주는 특별한 감광효과의 발견이다 : 다게르는 그의 협력자 니엡스가 가르쳐 준 기술적 내용을 면밀히 살펴본 후 니엡스가 끝까지 고집한 역청(Bitume de Judé) 대신으로 옥화은을 활용 1) 해 본 결과 사진적 실행에서 중요한 화학적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옥화은이 그때까지 널리 알려진 염화은(chlorure d'argent) 계열보다 빛에 대한 감광력은 분명히 떨어지지만 적어도 그 감광효과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 원래 할로겐은(halogenures d'argent)을 이루는 한 요소로 "Agl" 화학기호를 갖는 옥화은은 비록 빛에 특별히 예민하게 감광하지는 않지만 일단 다른 화학적 실체 특히 브롬(bromure)계열의 화합물(일명 가속 감광 화합물)을 조금만 첨가하기만 해도 그 감광력은 현저하게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의 발견은 갑작스럽게 이미지를 나타나게 하는 화학적 반응(여기서는 포지티브 이미지) 즉 "현상(developpement)"에 의한 잠상(image latente)의 발견이다. 이러한 잠상 이미지는 사실상 빛을 받을 때 즉각적으로 은판 표면의 요오드 감광층 밑에 형성되지만 현상하기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게레오타입은 그 출현으로부터 불과 몇 년만에 초기 다게르 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기술적 발전을 가지면서 그 진행방식도 새로 개선된 다양한 프로세스들을 갖게 된다. 그러나 다양한 방식으로 시행되는 다게레오타입 촬영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술적 과정은 은도금된 금속(구리)판 표면 위에 엷은 요오드 층을 입히는 작업 즉 "요오드화 작업(iodage)"이다. 우선 필요한 만큼의 크기 2)를 아예 처음부터 결정한 후 사각판의 네 귀를 둥글게 한 후 은판 표면을 여러 가지 연마기구를 이용해 가능한 곱게 표면을 닦는다(표면처리). 이러한 표면 작업은 1880년대 젤라틴 시대 이전의 모든 금속판과 유리판에서 필수 작업인데 그 이유는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의 성공은 근본적으로 표면의 고운 입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도금술은 오늘날과 같이 순간도금이 아니 때문에 표면에 입혀진 은층은 거의 고루한 표면을 가지지 못했다. 두 번째 단계로 촬영자는 이와 같이 미리 잘 준비된 얇은 은도금 판을 요오드 결정체들이 들어있는 상자에 넣고 밑에서 열을 가해 기화된 요오드 증기를 쐬여 은판에 황금색의 얇은 요오드층 3)을 생기게 한다. 이렇게 공들여 만든 은판을 즉각적으로 감광(촬영)시켜 곧 바로 현상을 해야 하는데 감광 후 요오드층에 숨어있는 이미지는 일단 수은 증기를 쐬면 서서히 눈에 나타난다. 물론 이때 작동자는 수은 증기 상자 안을 들여다보면서 표면의 고루한 반응에 맞추어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한다. 여하간 이러한 현상은 그때까지 몰랐던 새로운 발견이었고 궁극적으로 사진 발명의 결정적인 연대와 공식적인 사진의 역사를 만드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게레오타입은 당시 이러한 새로운 발명기술을 대중화하려는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서 단번에 성공의 바람을 타면서 기술적으로 미적으로 당시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켰다. 이러한 성공조건들 중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때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현실 그대로의 완벽한 모사력과 눈을 의심하게 하는 현실의 분명한 이미지였다. 이러한 거울 같은 이미지로 다게레오타입은 1839년 사진 공포 이후 즉각적으로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좀 더 엄밀히 말해 다게르 자신이 정착액(초기에는 일반소금을 나중에는 하이포)을 결정적으로 발견했을 때부터 다게레오타입의 엄청난 성공은 이미 보장되어 있었는데 왜냐하면 당시 자본주의의 확장에서 많은 유랑 사진가들과 우선 도시에서 그리고 지방으로 급속히 확대되는 일반 상업 스투디오의 상업화 가능성은 처음부터 이미지의 선명도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업혁명의 정점에서 당시 사람들의 감탄과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 것은 단순히 기계적 산물로서 복사 이미지가 아니라 풍경의 멀리 있는 대상까지도 선명히 나타내고 정물사진에서 아주 자세한 부분까지도 자세히 나타내는 한 마디로 다게레오타입의 놀라운 정확성이었다. "일간지와 주간지의 주필들에게 "정확성"은 이러한 기술방식(다게레오타입)에 대한 근본적인 판단 기준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재생의 "정밀성"과 자세한 묘사력은 응시자에게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을 보는 듯 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아주 자세한 부분도 볼 수 있는 이러한 놀라움은 결국 이러한 재생의 독창성을 보장해 주고 있다." 4) 이와 같은 언급은 오늘날 관점이 아닌 당시 처음 보는 사진 이미지에 대한 비평임을 고려해 볼 때 대단한 사회적 사건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결국 다게레오타입의 초기 첫 이미지들은 이미 그들의 성공을 예견하였고 당시 부르조아 계층의 시대적 요구인 현실의 정확하고 분명한 재현 다시 말해 초상사진의 대중화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탁월한 정확성과 선명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다게레오타입은 처음부터 초상을 위한 재현방식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초기 다게레오타입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풍경이나 정물에만 관계하였는데 다게레오타입 방식의 초상사진 영역의 적용은 그 기술적 발전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19세기 사진과 미술과의 상호영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궁극적으로 사진기의 노출 속도에 관계하였는데 특히 초상사진에서 노출시간의 단축은 거의 절대적 조건이었다. 다시 말해 초기 초상사진의 성공은 결국 모델이 취해야하는 포즈 시간에 달려 있었다. 1839년 당시 약 30분의 긴 노출을 요구한 초기 다게레오타입은 사실상 유령 같은 거리나 황량한 광경을 보여주는 기념물의 고착된 이미지들(images statiques)만 촬영할 수 있었고 노출 시간 동안 움직이는 많은 대상들을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움직이는 대상에 대한 사진 이미지는 그 사물의 움직임을 말해 주는 흐릿한 자국(filé)과 함께 나타나는데 많은 다게레오타입에서 이러한 흐린 자국은 쉽게 발견된다. "사진은 마치 선명함과 움직임 사이의 필연적인 대립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 사진은 단지 주제와 사진기가 절대적으로 서로 고착되었을 때만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아주 작은 움직임이라도 이러한 움직임의 자국은 흐린 윤곽이나 사라지는 듯한 이미지로 혹은 전혀 자국이 없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5) 그래서 흔히 우리가 다게레오타입을 언제나 선명한 이미지로만 생각하지만 1840년대 초기 다게레오타입의 이미지에는 분명하고 정확한 이미지와 함께 많은 움직임의 자국들을 볼 수 있다.

다게레오타입에서 움직이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의 성공은 절대적으로 노출시간에 달려 있다. 논리적으로 움직이는 대상의 속도보다 빠른 노출일 때 선명한 이미지는 보장되지만 반대로 그 이하일 때는 흐린 이미지로만 나타난다. 당시 부르조아 계층의 절대적 요구였던 초상사진의 활용은 우선적으로 바로 이러한 기술적인 조건을 요구했기 때문에 초기 다게레오타입의 기술적 개선 특히 노출시간의 단축은 불가피하였다. 왜냐하면 초상사진 제작은 곧 움직이는 인간을 모델로 하는 촬영이기 때문인데 예컨대 움직이지 않는 모델은 있어도 눈을 깜박이지 않는 모델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많은 다게레오타입 사진가들은 불과 몇 년 사이 이러한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기술적 발명과 효과적 방법을 내 놓았는데 특히 가장 중요한 선명한 이미지와 빠른 노출 속도는 결정적으로 초상사진의 성공을 좌우했고 반대로 사진의 흐린 이미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작가의 의도적인 이미지가 아닌 실패한 사진으로 간주되었다. 결과적으로 얼마 후 대중의 취향에 따라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된 대부분의 다게레오타입 초상사진에서 이러한 흐린 자국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시장 경제의 일반적인 수요 공급 원칙에 관계하기도 하지만 사진을 19세기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산물들 중 하나로 간주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관심은 1840년대 초기 아직 초보적인 장비와 기술에 의존해야 했던 당시 상황 속에서 불과 몇 년 동안 어떻게 인간의 모습을 정확히 그리고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이를 위한 노출 속도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였는가를 보다 면밀히 알아보는데 있을 것이다.


II 가속 감광물과 노출시간

1839년 다게레오타입 출현 당시 사진 기술은 사실상 완전한 장비를 갖춘 기술이 아니었다. 은도금된 동판에 차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을 옥화은의 아주 약한 감광력에 의해 얻어진 손바닥만한 작은 이미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완전한 이미지였다 : 금속 거울 위에 나타난 이미지는 검은 색이 아닌 회색조이며 조금만 문질러도 지워지고 또한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언제나 반사되는 빛을 피해 여러 각도 사이에서 이미지를 찾아야 하는 불편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움직이는 대상은 재현 불가능하고 약 50kg의 장비 무게는 작업의 기동성을 무력화시켰다. 특히 실행과정에 있어 감광판에 수은 증기를 입혀야 하는 현상작업은 아주 세심한 주의와 기술이 요구하는데 적절한 시간 조절과 노련한 기술 없이 좋은 이미지를 기대할 수 없었다. 아주 작은 실수에도 이미지는 거의 사라지고 또 나타난다고 해도 그 선명도를 잃어버린다. 이 부분에서 다게르 자신도 자세한 주의와 세심한 사용법을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상 초기 다게레오타입의 낮은 성공률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기술적인 문제에서 온다.

그와 같이 다게레오타입의 오리지날 프로세스는 많은 결점과 문제들을 가졌으며 사실상 대중에게 적합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대중에 알려지고 상업화의 가능성을 보인 다게레오타입 방식은 급속한 그 기술적 발전을 가지고 왔다. 특히 초상사진의 대중화에 있어 필수조건인 노출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단축되었다. 아라고에 의해 사진의 발명이 공포된 후 불과 몇 달만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이 방식의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이루어졌다 : 우선 노출 시간을 현저히 줄일 수 있는 소위 "가속 감광물"이라고 하는 화학적 첨가물들과 이중렌즈와 같은 보다 성능 좋은 렌즈의 출현 그리고 보다 선명하고 지속적인 이미지를 위한 매끈한 표면처리(polisage), 요오드 처리, 정착, 수세, 코팅 등의 많은 신기술들이 나타났다.

우선 다게레오타입 프로세스의 첫 단계인 감광판 표면처리에 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이미지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감광판의 표면 입자에 관계하기 때문인데 잘못 선택된 사진판이나 매끈하지 못한 사진판은 아무리 정교한 기술이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성공한 이미지를 얻지 못한다. "사진판 표면처리(polisage)는 의심할 바 없이 프로세스의 가장 예민한 작업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단계는 궁극적인 이미지의 성공을 크게 좌우한다 : 그래서 거기에 세심한 배려와 특별한 청결을 요구한다." 6)라고 당시 대표적인 다게레오타입 전문가인 고뎅(A.A. Gaudin)은 분명히 이러한 표면처리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부드러운 솜뭉치로 금속판 표면이 거울처럼 완벽히 반들거릴 때까지 가볍게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앞으로 뒤로 진행하면서 표면을 여러 번 문질러야 한다. 7) 왜냐하면 다게레오타입의 가장 밝은 부분은 거울과 같이 잘 문질러진 부분이기 때문인데 이미지의 성공은 결국 하이라이트의 표면적인 매끈함에 있다. 여하간 다게레오타입의 가장 대표적인 장점을 말하는 아주 밝은 청명함은 이미지에서 "거의 대부분의 미적 측면을 좌우하는 금속판 표면의 매끈함에 있다" 8) 그래서 밝고 깨끗한 다게레오타입을 얻기 위한 은도금 판의 아주 세심한 표면처리는 모든 처리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아주 중요한 단계를 차지하고 있다.

다게레오타입 이미지의 청명함을 좌우하는 또 하나의 기술적인 조건은 "정착(fixation)" 단계에 실행하는 "아비바주(avivage, 빛깔을 선명하게 하는 화학적 처리)"라는 보충적인 첨가방식이다. 이러한 처리는 당시 널리 알려진 새로운 방식으로 곧 다게레오타입에서 거의 필수적인 단계가 된다. 아비바주는 이미지의 정착에서 색조를 보다 분명하게 하고 동시에 지나치게 빛을 반사하는 거울현상을 줄이는 목적을 갖는다. "오리지날 다게레오타입으로 얻어진 이미지들은 좀 어리둥절한 거울 현상에 의해 정상적인 이미지를 나타내지 못했다. 게다가 이미지는 다소 불분명하였는데 왜냐하면 단지 수은과 은의 두 가지 색조에 의한 콘트라스트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국(바로 거기에 아주 심각한 결점을 보이는데)이미지는 극단적으로 하루살이였다 : 이미지는 조금만 문질러도 변질되는데 아주 부드러운 붓질에도 이미지는 거의 사라진다." 9) 그때 이러한 결점은 피조(Fizeau)의 처리방식에 의해 해결되는데 이 방식은 사진 인화지에 가벼운 금도금을 하는 것으로 해결된다 : "살아있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는 하이포(hyposulfite de soude)에 염화금(chlorure d'or)을 탄 화합물을 이미지 표면에 입힌 후 가볍게 데워주는 것으로 충분한데 그때 은판은 곧 바로 아주 얇은 금도금의 유약층으로 덮힌다." 10) 결과적으로 은판의 거울효과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며 검은 색은 더욱 검게 되고 반대로 하얀 색을 만드는 수은은 금과의 혼합물에 의해 아주 생생한 밝은 빛을 발하게 된다. 그와 같이 사진의 일반적인 색조는 중복되는 두 개의 금속들이 만드는 보다 생생한 대조적인 색조에 의해 시각적으로 보다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다게레오타입의 성능 개선을 위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궁극적으로 사진판의 노출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이러한 개선책들은 이미 우리가 언급하였듯이 크게 두 부분에서 이루어지는데 한편으로는 감광력 향상을 위한 사진판과 또 한편으로는 사진기(어둠상자)안의 조도를 높이는 광학적 장치 특히 렌즈에서 이루어졌다. 우선 사진판에 감광물을 입히는 작업에서 나타난 기술적 개선을 볼 때, 일단 사진판 표면이 아주 매끈하게 처리(polisage) 되면 사진판은 감광물을 함유한 엷은 표면 층을 입게 되는데 원래 초기 다게르가 언급한 사용법에서는 사진판 표면에 단순히 옥화은을 입히는 것(요오드 작업)만으로 감광판 준비가 끝난다. 그때 옥화은의 감광시간은 약 20-30분(한낮 볕에서 약 15분)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사진촬영에서 기술적 한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인물촬영을 위해 내리 쬐는 태양 아래서 약 15분의 노출시간은 사실상 대중 초상사진을 제작하기 위한 방식으로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옥화은을 대신하는 보다 예민한 감광물의 발견이 필연적이었다. "(...) 많은 연구자들은 요오드를 대신하고 감광력에 자극을 줄 수 있는 다른 화학적 실체를 구하는데 몰두했다. 그 결과 곧 바로 오늘날(당시 1841년) 모든 가속 감광물의 기본을 이루는 브롬(brome)과 염소(chlore)에서 이러한 화학적인 속성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예전에 몇 분을 요구하던 촬영과는 달리 불과 몇 초만에 사진적 감광(촬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 11) 염소와 브롬 그 자체로는 사실상 빛에 대한 감광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러한 실체들은 단독으로 은판에 활용될 경우에 빛을 감광 시킬 수 있는 어떠한 화합물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미 요오드가 입혀진 은판에 적용될 경우에는 감광물인 요오드에게 노출 시간으로 불과 몇 초만을 요구하는 대단한 감광력을 갖게 한다. 사실상 요오드 그 자체의 감광 속도는 거의 상용화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느리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게르가 발견한 요오드의 장점은 다른 화학적 실체와 비교적 쉽게 화합한다는 사실인데 1851년 발리꾸르는 이러한 요오드의 속성과 그 첨가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진술하고 있다. "사전에 미리 준비된 요오드 작업은 다게레오타입 프로세스에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임과 동시에 반드시 필요한 작업 단계이다. 그러한 작업은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작업에 있어 기초를 이루고 있고 또한 가속 감광 화합물의 발견 이후 오히려 그 중요성이 더 커졌다. 가속 감광 화합물의 효과는 근본적으로 요오드 층의 고루한 분포 상태에 달려 있다(또한 밝고 어두운 모든 중간 톤의 부드러움을 보장하면서 부드럽고 분명한 이미지를 보장하기 위해서 오리지날 다게레오타입 프로세스에서도 이미 이러한 작업은 중요한 단계로 간주되었다) : 이러한 여러 가지 화학적 실체물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사진적 공리를 볼 수 있다 : (사진 이미지의 성공은) 어떤 경우에는 사진판의 요오드 작업에 달려있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가속 화합물 층에 달려있을 것이다." 12)

다게르가 지시한 오리지날 다게레오타입 사용법에서 우선 금속판 위의 균일한 요오드 작업으로 사진판 작업이 끝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요오드 작업 이후 보충적으로 두 번째 사진판 감광 작업을 행하는데 이러한 작업은 사실상 초상사진 제작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요한 세 가지 화학적 실체물인 요오드와 염소 그리고 브롬이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많은 조합 방식들에 의해 혼합될 수 있는데 그러한 화학적 조합은 많은 가속 화합물을 만들어 낸다 : 당시 "증기 브롬, 요오드 브롬, 브롬화된 석회(chaux bromee), 유황 염화물(chlorure de soufre), 취화물(브롬계열 bromoforme), 레쾨르 리키드(liqueur de Reiser), 티에리 리키드(liquide de Thierry), 등은 가장 효과적인 가속 감광 화합물들이었다." 13) 처음으로 가속 감광 화합물을 활용한 이는 클로데(Claudet) 14) 인데 그는 요오드 염화물 증기에 사진판을 적용하여 이미지 형성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차후에 나온 많은 가속 감광 화합물들 특히 가장 늘리 활용되는 피조(Fizeau)의 방식 15) 에 비해 다소 감광력이 떨어졌다. 피조는 1841년 1월에 나온 그의 방식에 관해 "요오드 작업 이후 사진판을 아주 짧은 시간에 희석 브롬 증기를 적용시킨 결과 사진판의 감광력은 현저히 향상되었다" 16) 라고 기록하고 있다. 확실히 가속 감광 화합물은 다게레오타입 사진 촬영의 노출 속도에 극단적인 효과(수 초 이내)를 가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은 그렇지 않아도 아주 예민한 주의를 요구하는 다게레오타입 방식에 두 가지 또 다른 어려움을 가져왔다. 한편으로는 노출에 관계되는 새로운 복잡한 측면이다. 다시 말해 노출에서 극히 낮은 성공 확률을 말하는데 발리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실패한 사진 30장 중에서 적어도 25장은 잘못된 노출에서 온다. (...) 이는 결국 가속 감광 화합물의 활용에 관계한다"라고 언급한다. 그래서 사용자 입장에게 유일한 해결책은 사용자 자신들의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더듬이 방식으로 시행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노출시간은 많은 상황들 특히 주제가 설정된 주위 빛의 강도와 또한 사진판에 입혀진 감광층의 두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가속 감광 화합물을 요오드에 적용하는 기술적인 어려움이다. 우선 이러한 화합물을 만든 제조상에서 지시된 정확한 혼합을 요구하고 거기에 이미 입혀진 요오드와 정확한 비률과 함께 적당한 양을 고루 입혀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특별한 기술과 숙련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단지 강한 정신적 의지와 반복된 노력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술적 습득은 단지 개인적이고 일시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가속 감광 화합물들의 활용 방식들은 그것들의 제조상에 따라 각기 다른 활용법을 가지고 있고 또한 사용자가 자신의 많은 노력으로 어떤 가속 감광 화합물의 활용을 정확히 익힌다 하더라도 성능 좋은 또 다른 화합물이 새롭게 출현하여 그간 익힌 기술들을 무효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화합물의 사진판 적용은 끝없는 기술적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가속 감광 화합물들의 활용은 1840년 이후 당시 사진 사용자들에게 기술적으로 아주 어려운 장애물을 주었다. 그러나 현저히 노출시간을 단축시키는 이러한 활용은 초상사진으로 대변되는 다게레오타입의 대중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또한 장차 언제라도 촬영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사진 촬영자에게 사진의 새로운 충동과 가능성을 주었는데 결국 이러한 충동과 욕구는 엄청난 다게레오타입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1840년 말 클로데의 요오드 염화물의 발견 이후 르레부르(Lerebour)는 클로데의 방식을 응용하여 응달에서 15-20 초의 노출시간으로 인물 초상사진 제작에 성공했고 피조 역시 자신이 발견한 가속 화합물로 30초 노출 초상사진에 성공했다. 비송(Bisson)은 1841년 6월 달에 태양아래서 10초의 노출로 초상사진을 얻었다. 그러나 몇 몇 문헌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이러한 초상사진의 노출 기록들은 절대적 기준에 의한 사실도 또한 객관적으로 정확히 기록된 사실도 아니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모델이나 주제 주위의 배경과 촬영의 일반적 기술조건에 따라 아주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기록일 뿐이다. 더구나 자신들이 개발한 가속 화합물의 우월성을 위해 다소 과장된 기록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과장된 기록이라 할지라도 1839년 초기 다게레오타입의 노출시간이 약 30분이었던 기술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불과 약 2년 후인 1841년 당시 거의 "순간 스냅사진"과 같은 초 이하의 노출 속도로 제작된 사진이 있다면 아마도 우리의 눈을 의심할 것이다. 움직이는 사물에 대한 촬영은 단지 흐린 윤곽으로만 나타나고 더구나 겨우 몇 몇 가속 화합물만 알려져 있던 당시의 기술적 상황으로 볼 때 이러한 가설은 우리에게 거의 신빙성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고뎅(M.A.A. Gaudin) 17) 의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인데 자신이 촬영한 사진의 노출속도가 약 1/10초를 기록했다고 자신이 직접 쓴 그의 책에 진술하고 있다 : "오늘날 피조의 브롬용액과 고뎅의 요오드 브롬이 있지 않는가 ? 우리는 이러한 화합물로 우리가 순간사진이라고 하는 사진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장면들은 1/10초의 노출속도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움직이는 자동차와 사람들을 구별하고 초상사진들은 맑은날 응달에서 1/4초 혹은 1/2초의 노출속도로 제작된다" 18) . 사진 촬영자의 의도대로 자연적이고 예술적인 사진 제작 즉 관상학적 "표현"(움직임과 행위는 제외하고)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예견한다 : "이러한 노출속도로 초상사진들은 아주 섬세한 측면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관상학 표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방법으로 생명과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몇 몇 사람들의 매혹적인 그룹사진을 찍을 수 있다. 예술적 문맥에서 굳이 작가들이 이러한 발견을 의도적으로 강조할 필요도 없다. (...) 그들은 움직이고 있든 쉬고 있든 여하간 얼굴 관상, 형상, 동물 등과 같은 것들을 모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19) .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얻어진 이미지는 현실적으로 특히 초상사진에서 아주 특별히 예외적인 몇 몇 장면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여기서 고뎅이 언급한 초 이하의 노출속도는 사실상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스냅사진"의 경우와 같이 현실의 움직임을 완벽히 포착하는 그러한 노출시간이 아니며 게다가 고뎅이 말하는 관상학적 "표현" 역시 나다(Nadar)나 카르제(Carjet)가 만든 사진과 같이 흔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예술사진과는 달리 단지 이미지의 복사만을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고뎅이 언급한 예술적 표현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이해되고 당시 많은 사람들도 이러한 초 이하의 순간사진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뎅의 초 이하의 노출속도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언급해 보면 아무리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로 인해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논리적인 측면에서 수긍할 수 있는 기록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과학 아카데미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1841년 5월 고뎅은 바람에 밀려가는 구름을 1/10초 노출속도로 촬영했고 20) 또한 그가 1/19초의 노출시간으로 제작했다고 주장(그가 직접 기록한 진술)하는 퐁네프 다리를 보여 주는 순간 장면 21) 을 촬영했다. 거기서 이미지는 걸어가는 사람과 움직이는 마차를 보여주고 있다." 22) 라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또한 같은 책의 또 다른 기록은 이러한 진술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 "고뎅의 기록은 1841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조셉 황제 광장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1초의 노출속도로 찍은 독일인 나테레(Natterer)형제의 사진을 본다면 더 이상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에데(Eder)는 이러한 사진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순간사진으로 믿고 있다 (...)". 23)

쉽게 말해 고뎅은 자신의 다게레오타입 촬영에서 초 이하의 노출속도로 순간 촬영했다는 말인데 과연 기록상의 말대로 그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했을까 ? 아니면 단지 과장된 진술일까 ? 우선 그 기술적인 가능성에 관해 언급해보면 "1850년 이전(즉 콜로디온 시대 이전)까지 사실상 수 초 이하의 노출속도로 제작된 초상사진은 무수히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은 단지 고착된(不動) 이미지들인데 움직이는 주제에 대한 사진적 재현은 오랫동안 불가능했다." 24) 다게레오타입 방식에서 수 초 이내의 긴 노출로 촬영 가능한 움직이는 주제는 유일하게 초상인데 그것도 많은 악세사리나 방법상의 효과를 동원하면서 촬영자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치밀하게 조작해야 하는 조건을 달고 있다. 그래서 다소 가까운 거리에서 초 이하의 빠른 노출 속도를 요구하는 움직이는 주제에 대한 사진적 포착은 불가능했다. 다게레오타입의 긴 노출은 또 다른 이유에서 불가피한 촬영 조건이 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용자들이 가졌던 사진적 가치에 관계한다 : 촬영자들은 결과물로 나타나는 사진 이미지에서 단지 선명한 이미지만을 사진 실행의 성공으로 간주했고 또한 이를 위하여 언제나 그들은 사진적 실행에서 최대한 좁혀진 조리개를 선호했다. 25) 그래서 실질적으로 19세기 초 특히 1840년대 주류를 이룬 다게레오타입에서 흐린 이미지와 움직이는 주제들은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불명확한 이미지들을 실패한 사진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비록 긴 노출이라 할지라도 사진은 언제나 선명해야 된다는 사진적 가치를 우선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가치로 볼 때 사실상 고뎅의 다게레오타입에서 보여주는 기록적인 초 이하의 노출 속도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요오드 층을 입은 은판의 감광력이 향상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의심할 바 없이 가속 감광 화합물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언급된 여러 가지 기록과 실증적 자료를 보면 아무리 탁월한 가속 감광 화합물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몇 초의 노출시간을 요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다게레오타입에서 초 이하의 노출 속도는 단지 가속 감광 화합물이 첨가된 사진판 그 자체의 놀라운 감광력 때문만이 아니라 빠른 노출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이유 다시 말해 아주 축소된 사진판과 현저하게 개선된 렌즈 덕분으로 가능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1840년대 초 이러한 기술적인 이유를 분명히 밝혀줄 자료나 기록은 현재까지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모호하게 기록하고 있다. 1840년대 초 가속 감광 화합물과 함께 적용된 은판의 노출 시간를 알아보기 위하여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탁월한 가속 화합물로서 취화염 석회(chlore-bromure de chaux)를 제안한 그로(Gros)남작은 이러한 화합물을 은판에 적용할 경우 필요한 노출시간을 자신이 직접 언급하고 있다 : "난 취화염 석회를 적용한 몇 장의 다게레오타입을 만들었는데 언제나 탁월한 색조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빠른 감광력을 본다. 난 언제나 큰판에 아주 좁은 조리개로 (...) 긴 초점 거리를 갖는 렌즈를 사용했는데 좀 더 많은 조도를 필요로 하는 이러한 조건에서 난 대낮 내리 쬐는 태양 밑에서 5-8초 그리고 구름 낀 상황에서 15-20초의 노출시간으로 아주 좋은 사진들을 만들었다." 26) 그로의 가속 감광 화합물은 직접 석회에 브롬염과 브롬을 직접 부어만들어 수 있다. 27) 그런데 이러한 진술에서 결과적으로 선명한 이미지는 분명히 보장되지만 반대로 그 노출속도는 큰판과 장 초점렌즈 그리고 아주 좁혀진 조리개에 의하여 보다 길게 연장될 것이다. 노출 시간을 연장시키는 이러한 조건들은 촬영자가 그 반대의 조건들 즉 적은 양의 빛으로도 감광 가능한 작은 사이즈 판과 아주 짧은 렌즈(이중 렌즈) 그리고 다소 열려진 조리개를 은판에 적용할 경우 그때 거의 초 이하의 노출속도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게레오타입 촬영에서 적어도 이론적으로 초 이하의 노출속도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많은 가속 감광 화합물들 중에서 몇 몇 화합물 소위 "구형 가속 화합물(1840년 경에 출현)"들은 특별히 예외적으로 아주 빠른 노출속도를 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요오드 취화물의 예외적인 적용하는 클로데의 가속 감광 화합물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가장 빠르고 가장 완벽한 가속 감광 화합물이라고 (클로데는)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28). 게다가 "염산(acide chloreux)을 적용시켜 적어도 1/2초의 노출속도로 나무랄 수 없는 사진들을 만들 수 있다" 29)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해 볼 때 고뎅의 놀라운 노출 기록은 더 이상 터무니없는 진술이 아니라 충분히 설득력 있는 사실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고뎅의 다게레오타입은 소위 "고뎅의 리쾨르"라고 불리는 가속 감광 화합물(요오드 취화물 bromure d'iode) 30)에 의해 만들어진 사진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뎅이 적용한 요오드 취화물은 다게레오타입 사진판에 적용되는 많은 가속 감광 화합물들 중 가장 효과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 원래 브롬(취소) 31)은 은판에 이미지를 형성시키는 가속물로서 가장 탁월한 화합물이고 염소나 요오드와 함께 보다 편리하고 보다 용이하게 또한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화학적 화합을 한다. 그래서 브롬은 가속 화합물의 가장 기본적인 화학적 요소를 이루는데 흔히 브롬과 석회의 화합물, 브롬 석회, 염화브롬 석회는 다게레오타입의 감광 가속물로서 가장 탁월한 효과를 준다. 그와 같이 브롬은 요오드에 활용하는 가속 감광 화합물로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고 또한 사용자에게 가장 익숙한 화합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많은 화합물들 중 옛날 가속 화합물로서 이용되었고 또한 고뎅의 가속 화합물이기도 한 요오드 취화물(bromure d'iode)은 당시 화학자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고뎅이 1841년 자신이 직접 쓴 책에서 이러한 화합물의 특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일반적으로 요오드 취화물은 (...)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취소(brome)로 변해버린다(취소와 염소 그리고 요오드의 세 가지는 화학적 원소 특성상 불안정한 화학물이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변질되어 얼마 후 같은 조건에서 최초의 사용 목적을 말하는 화학적 효과(가속 감광)를 중단해 버리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가끔씩 준비된 시험관 물에 희석된 브롬을 감광판에 첨가하거나 혹은 아예 이러한 희석 브롬용액을 담은 용기에 사진판을 담금으로서 간단히 해결된다. 그와 같이 오늘날(1841년) 단 1초의 노출로 사진을 만들 수 있게 하는 는 요오드 취화물은 한 달 후 그대로 사용할 경우 열 배의 노출시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거기에 브롬 희석용액을 첨가함으로서 즉각적으로 최초의 감광력을 회복한다." 32)

이와 같은 기록에 미루어 볼 때 고뎅은 의심할 바 없이 당시 가속 화합물의 활용에 있어 아주 능숙한 장인이었으며 또 그가 이러한 화합물의 탁월한 효과를 최대한 살리면서 사진 촬영에 있어 최초로 초 이하의 노출시간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은 더 이상 터무니없는 사실이 아니라 충분히 있음직한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고뎅의 이러한 기록에 대한 진실은 언제나 모호하게 남아 있을 것이고 보다 정확한 분석을 위해 다게레오타입 사진판의 노출시간을 줄이는 또 다른 요인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III 이중렌즈와 다게레오타입

사진 촬영에서 노출속도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다른 측면 즉 사진판의 감광력과 렌즈를 통하여 사진 장치(어둠 상자)에 들어오는 빛의 양에 달려있다. 이러한 두 조건들은 노출시간단축을 위한 필수조건들이며 서로 상호 보완 관계를 갖는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가속 감광 화합물을 적용하여 사진판의 감광력을 극대화시킨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사진판에 도달하는 빛의 양이 부족한 경우(혹은 지나치게 큰판을 사용할 경우) 노출시간의 단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진적 장치는 크게 렌즈와 동체(조리개, 어둠 상자 공간)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사진판에 도달하는 빛의 양은 근본적으로 사진기가 장착한 렌즈 시스템에 달려있는데 일반적으로 두 가지 사진적 공리를 가진다 : 한편으로 단 초점 렌즈는 장 초점 렌즈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빛을 사진판에 전달하고 또 한편으로는 조리개가 크게 열릴수록 많은 양의 빛이 사진판에 수렴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선명한 이미지를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물론 노출시간의 단축은 물론 조리개의 열린 정도에 비례하겠지만 이미지의 성공을 위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조리개를 크게 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규범이다. 결국 사진적 실행에 있어 소위 성공한 사진이라고 하는 선명한 사진 이미지와 순간 동작의 포착을 위한 빠른 노출 속도는 사진판의 감광력 만큼이나 렌즈 시스템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사진기의 원조를 바늘구멍을 가진 어둠상자에 렌즈가 장착된 어둠상자로 이해되는데 19세기 사진발명 당시 알려진 사진기의 형태는 이미 렌즈가 장착된 어둠상자였다. 사실상 이러한 형태는 니엡스가 렌즈(볼록)를 붙여 만든 어둠상자 이전 이미 몇 세기 전부터 출현했었다. 사진적 장치를 렌즈와 동체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때 어둠상자 동체는 밀폐된 큰 나무상자에서 작은 사이즈로 소형화되고 단순화되고 수동 조리개(최초의 조리개는 니엡스가 고안한 꽃잎 조리개)가 장착되고 또한 동체 뒷 편에는 노출순간에 정확히 사진판으로 대체될 반투명 유리까지 끼워진 사실상 오늘날 카메라의 구조를 거의 갖추게 된다. 그러나 렌즈의 발전은 과학적 분야 특히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어둠상자에 활용된 렌즈는 1812년 월라스톤(Wollaston)의 메니스크(menisque) 렌즈가 나오기까지 오랫동안 발전을 가지지 못했다 : 사실상 당시 깨끗한 유리의 활용(당시의 유리들은 거의 반투명이었다)으로 굴절되는 수차를 교정한 무수차 렌즈가 이미 50년 전부터 나왔지만 망원경을 위한 렌즈 이외는 거의 활용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 18세기 어둠상자의 중요성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19세기 초 까지 어둠상자의 반투명 유리에 보이는 이미지는 심각한 몇 몇 수차들로 인해 언제나 그 윤곽이 흐리게 나타났는데 이는 당시 피할 수 없는 큰 장애물이었다. 무수차 렌즈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교정시킬 탁월한 렌즈들이었지만 그때까지 사진적 연구에 활용되지 않았다. 니엡스의 경우도 이미 당시 메니스크와 무수차 렌즈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가 책에서 본 단순 볼록렌즈만으로 사진기를 만들었는데 이러한 렌즈로 선명한 이미지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그의 발명은 렌즈의 무지에 의해 좌초된 셈이다. 여하간 렌즈의 연구는 선명하고 밝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 과정이며 사진에 적용된 대부분의 렌즈의 발전은 실질적으로 1839년 사진의 공포 이후 시작되었으며 특히 렌즈의 개선은 1840년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요구한 초상사진의 필요성에 의해 불과 몇 년만에 급속히 이루어졌고 그 성능 또한 몇 몇 심각한 수차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오늘날 렌즈에 가까운 성능을 가진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다게레오타입은 바로 이 시기에 초상사진을 목적으로 적용된 탁월한 렌즈들을 장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렌즈의 발전은 촬영시 노출속도를 단축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 우리의 논의는 좀 더 세부적으로 이러한 렌즈의 발전에 집중될 것이다. 다게레오타입 렌즈의 발전은 두 가지 측면에서 확인될 수 있다 : 수차와의 관계에서 현저히 개선된 렌즈들의 출현과 "이중 렌즈"의 출현. 우선 렌즈의 발전은 근본적으로 렌즈가 가지는 수차(aberration)와의 싸움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완전한 렌즈는 그 수차들을 완벽히 제거한 렌즈를 말한다. 수차는 정상적인 이미지 형성을 방해하는 렌즈의 왜곡 현상으로 크게 일곱 가지 수차들이 있다 : 구면수차(aberration spherique), 코마(coma), 난시(astigmatisme), 만곡(courbure de champ), 왜곡(distortion), 색 수차(aberration chromatique), 위치 색 수차(aberration chromatique de position), 이러한 수차들은 이미지의 선명도와 콘트라스트 그리고 빛의 조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수차들은 렌즈의 활용 즉 빛을 모으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들인데 특히 단순 렌즈로 얻어진 이미지에서 심각하게 나타난다. 이때 방법적으로 조리개를 최대한 줄이면서 혹은 몇 몇 특수한 필터들을 사용하면서 수차들을 최소화할 수 있는데 완전한 수차제거를 위해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3-20개의 렌즈(유리가 아닌 특수 플라스틱)들이 중첩된 복합렌즈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렌즈의 완전한 수차제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19세기 초 이러한 수차들 중 가장 심각한 수차들은 구면수차와 색 수차(오늘날까지도 완벽한 교정은 거의 불가능)였는데 당시 거의 모든 복합렌즈에서 나타난 큰 장애물이었고 또한 당시 가장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였다. 다행히도 색 수차는 당시 이미 나온 무수차 렌즈에 의해 어느 정도 교정되었지만 구면 수차는 여전히 큰 광학적인 장애물이었다. 특히 정확한 데생을 목적으로 사진을 사용하는 화가들에게 이러한 구면수차는 큰 문제였다. 구면수차의 설명(도표 1)에서 점 1은 오브제의 정확한 초점에 의한 완전한 이미지를 갖는 반면 점 2에서는 구면수차로 인한 불완전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렌즈의 축과 평행하게 진행하는 빛들 중 렌즈의 가장자리를 통과하는 빛들의 초점은 렌즈의 중심을 통과하는 빛의 초점보다 조금 앞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서로 다른 초점들에 의해 나타나는 이미지는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갈수록 흐려지고 반대로 화면을 약간 앞에 있는 A지점으로 이동하면 가장자리의 이미지는 선명하게 되지만 중심부는 흐려진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렌즈가 1812년에 나온 유명한 "월라스톤(Welaston)"렌즈(도표 2)이다 : 왼쪽 그림은 구면수차를 가진 렌즈의 어둠상자인데 여기서 이미지는 볼록렌즈(bi-convexe)의 중앙을 통과한 빛에 의해 형성되는 중심부는 선명하게(선명한 A)되고 반대로 가장자리를 통과한 부분(흐린 B)는 흐리게 된다. 그러나 오른쪽 그림은 단순한 볼록렌즈가 아니라 초승달의 모양을 가지면서 오목과 볼록의 두 개의 굽은 곡선(1 대 2)을 갖는 렌즈(이러한 형태의 렌즈를 메니스크)로 대치된 어둠상자의 구조이다. 이 렌즈는 1812년 월라스톤에 의해 발명된 것으로 흔히 "월라스톤 메니스크" 혹은 "페리스코피크(periscopique)"라고 하는데 앞서 언급한 볼록렌즈의 가장자리와 중심부의 불균형을 최대한 제거하면서 현저하게 분명한 이미지를 만든다. 이때 고정 조리개는 오목한 면이 언제나 어둠상자 외부를 향하고 있는 렌즈 앞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렌즈의 활용은 언제나 최대한 줄여진 조리개의 사용조건을 동반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많은 양의 빛을 잃어버린다. 다시 말해 선명한 이미지를 위해 지나치게 조리개를 좁혀야 하는데 이는 결국 충분한 빛의 양을 위해 긴 노출을 해야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러한 결점을 줄이기 위해 "슈발리에(Chevalier)는 월라스톤 렌즈에 우선 1819년에 프리즘으로 대치하고 또 1823년에는 메니스크 프리즘으로 대치했다" 33)이라고 하는데 이중렌즈는 사실상 1834년부터 안경이나 만원경의 렌즈와 같이 광학적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그러나 곧 바로 1840년 경 다게레오타입 은판의 가속 화합물의 출현과 동시에 . 그런데 여기서 1828년 8월 20일 니세포르 니엡스가 그의 형 클로드 니엡스에게 보낸 편지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니엡스는 그가 이미 사용해 본 슈발리에의 프리즘 메니스크보다 페리스코피크 렌즈의 결과가 훨씬 더 좋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이론적으로 잘못된 진술이다. 아마도 니엡스가 선명한 이미지에 너무 집착하여 전혀 노출속도를 고려하지 않고 두 개의 렌즈를 비교한 결과라고 짐작된다. 그 결과 극단적으로 줄여진 조리개 덕분으로 월라스톤 렌즈의 탁월한 성능을 강조했고 1826년 10월에 그가 파리에서 슈발리에에게서 65 cm 장 초점 렌즈 어둠상자를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828년이 되어서야 영국의 친구 영(Young)으로부터 월라스톤 메니스크를 알게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니엡스는 확실히 렌즈에 관해서는 초보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골 출신인 니엡스가 자신이 연구한 기술을 거의 고스란히 다게르에게 내 놓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는 렌즈에 대한 자신의 무지 때문인데 그의 눈에 다게르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렌즈의 특별한 비밀(계약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게르가 1829년 자신이 어둠상자에 장착한 렌즈들은 도시인들에게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진 무수차 렌즈와 월라스톤의 페리스코프 이었을 뿐이었다.

니엡스의 어둠상자에 장착된 렌즈는 색 수차를 줄여주는 무수차 렌즈가 아니었다. 반면 다게레오타입의 렌즈들은 대부분이 무수차 렌즈를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었다. 색 수차는 서로 다른 파장의 길이로 인해 생기는 초점들의 불일치 현상을 말하는데 그로 인해 이미지는 언제나 흐려진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러한 문제는 망원경에서 뿐 만 아니라 어둠상자에서도 비교적 일찍부터 해결되었다 : 그림(도표 3)에서 렌즈의 축과 평행하게 지나는 빛들을 보여주는데 서로 다른 파장의 길이로 인해 서로 다른 초점들을 갖는 현상을 말한다 : 긴 파장의 붉은 색은 짧은 파장의 푸른색보다 훨씬 앞에 수렴한다. 그로 인해 이미지의 윤곽은 모든 무지개 빛을 가지면서 불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색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렌즈는 평범하게 플린트글라스(flint-glass)와 크라운글라스(crown-glass)의 두 종류 렌즈로 조합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합에서 서로 다른 색들은 교정된다.

당시 렌즈의 두 번째 혁신적인 발전은 슈발리에에 의해 고안된 새로운 형태의 복합 렌즈의 출현이다. 이러한 출현은 우선 현저하게 노출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도록 사진판에 최대한의 빛의 조도를 증가시키는데 있으며 동시에 조절 장치를 통해 다양한 초점을 가지면서 가능한의 수차를 교정할 목적을 가진다. 이러한 복합렌즈를 "이중렌즈(objectif double)" 혹은 "독일 시스템" 34) 초상사진의 목적으로 사진에 적용되었다. 이러한 이중 복합렌즈로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어둠상자 그 자체를 줄이지 않고 초점거리를 최대한 짧게 하여 사진판에 최대한의 많은 빛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단순 복합렌즈는 크라운과 플린트의 서로 다른 종류의 렌즈로 밀착된 하나의 복합렌즈 다시 말해 단순히 오목 렌즈와 볼록 렌즈가 서로 겹쳐진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볼록렌즈의 튀어나온 부분은 오목렌즈의 오목한 부분과 정확히 겹쳐져 있다. 그러나 외관상으로 이들 두 렌즈는 하나의 렌즈로 보이기 때문에 흔히 단순렌즈라고 한다. 이러한 렌즈의 목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수차 렌즈를 구성하기 위함인데 즉 이미지의 가장자리나 윤곽에 색이 나타나는 것을 제거하는데 있다. 또한 이것은 불완전한 렌즈 구면에 빚지고 있는 구면수차를 어느 정도 제거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순렌즈는 사진기와 모델 사이의 긴 거리 즉 초상사진이 아닌 원칙적으로 풍경이나 기념물 촬영에만 적용되는 언제나 장 초점을 요구하는 불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초기 다게레오타입이 장착한 이러한 렌즈는 장 초점의 큰 어둠상자와 큰 사진판 그리고 긴 노출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에 아주 빠른 노출과 짧은 초점거리를 요구하는 초상사진 촬영용 렌즈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1840년대 초부터 초상사진을 위한 새로운 렌즈의 요구는 필연적이었고 또한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수 년 내 곧 급속한 렌즈의 발전을 가져 왔다.

이중렌즈(도표 4)는 단순 복합렌즈에 양철-볼록렌즈(bi-convexe)와 오목-볼록렌즈(concave-convexe)가 합쳐진 또 하나의 복합렌즈가 추가된 이중구조의 렌즈들을 말한다. 이중렌즈는 모델과의 긴 거리를 요구하지 않는 짧은 초점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초상사진에 활용되었다. 단순 복합렌즈에 비해 우선 깨끗한 이미지 선명한 윤곽 그리고 촬영시 충분히 빠른 노출속도를 보장해 주었다 : 이중렌즈가 장착된 다게레오타입 초상사진 촬영에서 가속 화합물을 입힌 은판에 필요한 노출시간은 불과 10초면 충분하였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선명한 이미지는 보장되는데 그 이유는 충분한 양의 빛 덕분으로 충분히 좁여진 조리개의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35) . 일반적으로 앞의 렌즈 6 cm 그리고 뒤에 위치한 렌즈는 8 cm의 지름을 갖는 이중렌즈는 164 x 216 (mm)의 크기를 갖는 전판의 경우 약 35 cm의 초점거리를 갖는데 이는 같은 전판의 경우라도 55 cm의 긴 초점거리를 가진 초기 단순 복합렌즈가 장착된 다게르의 어둠상자에 비교해 보면 불과 몇 년 사이의 엄청난 렌즈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


IV 고뎅과 다게레오타입

노출시간을 단축시키는 또 다른 방법은 사진판 크기를 줄이는 방법(오늘날 35 mm 사진은 당시에 비해 엄청나게 축소된 크기)이다. 사진판이 줄어들면 같은 빛의 양의 상태에서 노출시간은 그 면적만큼 비례하여 줄어들고 또 그만큼 선명한 이미지를 위해 조리개를 좁힐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렌즈의 초점거리는 현저히 줄어들어야 하는 조건을 가진다. 다시 말해 작은 사이즈의 사진판의 활용은 필연적으로 짧은 초점을 갖는 이중렌즈를 요구하고 긴 초점을 갖는 단순렌즈와의 조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진에서 사진판은 초점 길이에 비례하여 커지기 때문이다.

원래 전판은 초기 다게르가 지정한 사진판 크기인데 완전한 사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크기를 기준으로 그가 자세히 지시해 놓은 대로 어둠상자와 렌즈를 잘 맞추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가지 사진판 크기를 적용하기 위해 이러한 지시들을 수정하여 갈수록 적은 사이즈의 사진판을 선호했다 : 164 x 108(mm)의 크기를 갖는 반판(demi-plaque)이 있고, 108 x 82(mm) 혹은 140 x 82(mm)의 1/4판이 있었다. 또한 1/8판에 해당하는 80 x 70(mm) 그리고 60 x 40(mm)의 약 1/16판까지도 있었다. 이러한 작은 사이즈들을 새로운 사진기에 적용하기 위해 또한 가능한 가장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 뷔롱(Buron)은 렌즈 초점 길이와 사진판 사이즈의 관계에서 두 가지 공리를 놓고 있다 : 하나의 공리는 "사진판에서 가장 긴 길이는 렌즈 초점거리와의 관계에서 1 : 2 가 되어야한다라는 것이고 또 하나의 공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 빛이 들어오는 조리개의 지름은 초점길이의 약 1/7이 되어야 한다." 36) 여기서 첫 번째 언급된 공리는 "렌즈의 초점과 크기에 상관없이 가장 큰 크기의 이미지 다시 말해 사진판의 대각선의 길이는 적어도 그 초점거리의 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원하는 크기만큼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인데 그럴 경우 렌즈는 이러한 두 공리에 의해 사진판 크기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37) . 특별히 이러한 공리들에 따라 인물이나 정물 등과 같이 주제와 보다 가깝게 촬영해야 하는 경우 흔히 작은 사이즈의 사진판을 사용하는데 그때 선명한 이미지와 빠른 노출속도는 적어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반대로 긴 초점거리를 요구하는 큰 사이즈의 사진판 사용은 주로 빠른 노출이 필요 없는 풍경과 기념비나 움직이지 않는 오브제에 대한 촬영에 이용된다. 이때 긴 노출과 부족한 빛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좁혀진 조리개의 활용으로 선명한 이미지를 만든다.

여기서 당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한 고뎅의 다게레오타입 사진기를 다시 보자. 그가 개발한 가속 화합물 이외 특별히 고안된 자신의 사진기는 그가 직접 언급한 놀라운 기록 즉 초 이하의 노출속도에 대한 다소 확실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과장된 기록일 수도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자신의 기록에서 어느 정도 짐작된다 : "노출속도에 관해 어떠한 사진기도 고뎅의 사진기와 비교할 수 없다. 우리들의 사진기를 사용하여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잘 말해 주듯이 우리는 "가장 훌륭한 초상은 바로 우리 사진기가 만든 것이다"라고 분명히 단언할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분명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38) 그와 같이 고뎅은 당시 평범한 다게레오타입 사진기와는 분명히 다른 사진기를 자신이 직접 제작하였다. 최초의 사진기는 1839년 8월 20일에 만들어졌고 몇 년 후 그는 작은 사이즈 사진판을 사용하는 "다게레오타입 고뎅"이라는 이름의 탁월한 사진기를 제작하여 상업화하였다. 39)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고뎅의 사진기는 분명히 작은 사진판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짧은 초점의 렌즈가 장착되었다. 그러나 그 렌즈가 이중렌즈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기록은 1839년에 이미 고뎅의 사진기에 예외적으로 이중렌즈 혹은 이와 유사한 렌즈를 장착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 "(...) 우리 프랑스 광학자들에 의해 어둠상자에 최근 새로운 개선 장치가 장착된 것은 단지 다게르의 사진 발명 이후의 일이다. 40) " 여기서 언급된 최신 장치는 의심할 바 없이 이중렌즈를 말하고 있고 또 고뎅과 그의 동생은 이러한 렌즈를 장착하여 새로운 자신의 사진기와 사진판을 제작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파리의 광학자 레르부르(Lerebours)와 함께 파리에서 초상사진 스투디오를 열어 초상사진 천 점 이상을 찍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1841년 그들은 훨씬 더 개선된 새로운 다게레오타입 사진기(1841년형 고뎅의 다게레오타입)를 소개했다. 이 사진기에는 초점거리가 아주 짧은 이중렌즈가 장착되어 있는데 렌즈는 지름 7.2 cm(약 1/6 판)의 둥근 사진판을 적용시키는 "레르부르의 무수차 렌즈"였다. 고뎅의 사진기는 특별히 빌로오드로 된 막 셔트가 장착되어 있는데 이러한 장치는 의심할 바 없이 사진촬영의 빠른 노출속도를 암시하고 있다. 41) 아마도 바로 이러한 탁월한 사진기를 가지고 1942년 7월 30에서 8월 3일까지 파리 노트르담에서 진행된 오를레앙 공작 장례식 장면(도판 5)을 거의 순간 스냅사진(지름 7,.2 cm)으로 포착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유일하게 하나만 존재하는 이러한 다게레오타입은 그날 사람들의 무리를 거의 스냅형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최초의 사진이다." 42) 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기록된 진술로만 보면 이러한 이미지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스냅사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초 이하의 노출기록은 그 어떠한 문헌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여러 가지 기술적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추측할 뿐이다. 비록 아주 짧은 초점거리와 새로운 이중렌즈에 의해 거의 스냅에 가까운 이미지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가 함축하는 초 이하의 노출속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초 이하의 노출을 가능하게 하는 자동 셔터(사실상 1880년대 출현)는 당시의 기술적 상황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하다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사진기에 장착된 조리개는 노출속도와 이미지의 선명도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선명한 이미지를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다게레오타입 사진촬영에서 좁혀진 조리개은 거의 필수적이다. 사진에서 선명한 이미지는 우선 좁혀진 조리개의 결과로 간주된다. 여하간 그 어떤 경우라도 열려진 조리개의 활용에서 선명한 이미지를 기대할 수 없다. 사실상 조리개의 활용은 가능한 렌즈가 안고 있는 많은 수차들 특히 구면수차를 제거할 목적을 갖는다. 이때 조리개는 알다시피 렌즈의 구면으로 인해 굴절되는 빛(흐린 이미지)을 탈락시키고 동시에 가능한 렌즈의 축과 평행한 빛(선명한 이미지)만 통과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조리개가 좁혀질수록 이미지는 선명하게 된다 : 예를 들어 큰판을 요구하는 (장)초점길이 30-35 cm인 렌즈의 경우 (뷔롱에 의하면) 약 4 cm의 조리개를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초상사진이나 가까운 대상을 촬영할 때 요구하는 작은 판과 단 초점 렌즈의 경우 보다 좁혀진 조리개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은 엄격한 비률을 갖지 않는다. 그처럼 선명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는 좁혀진 조리개가 필수적인 반면 열려진 조리개의 활용은 특별히 빠른 노출속도를 요구하는 촬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굳이 열려진 조리개를 사용할 경우 결과적으로 사진은 그 이미지의 선명함과 투명함을 희생시켜야 함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빠른 노출은 결코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지 못한다라는 사진적 공리를 꼭 기억해야한다. 의심할 바 없이 빠른 속도는 초상사진과 같은 사진적 실행에서 보다 유리하고 필요한 조건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신속히 실행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만들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데 부알로(Boileau)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가르쳐 준다 : 지나치게 너무 빠른 속도로 찍지 마라 " 43)


V 다게레오타입의 환상

다게레오타입은 우선 그 선명한 이미지에 거의 모든 사진적 가치를 주고 근본적으로 "연속(중간 톤)"의 특징을 갖는 절대적인 아날로그 이미지다. 이러한 선명한 이미지는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물론 당시 현저히 개선된 렌즈(이중렌즈 혹은 대물렌즈)와 요오드의 감광력을 가속시키는 놀라운 가속 화합물의 출현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다게레오타입의 선명한 이미지 그 자체는 사실상 노출 순간에 줄여진 조리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여하간 초상사진 촬영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기술적 조건을 동시에 요구하며 엄밀히 말해 초상사진에 대한 다게레오타입의 성공은 단지 그 이미지의 선명함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빠른 노출속도에도 있었다. 그때 이러한 노출시간을 위한 이중렌즈의 출현과 가속 감광물의 출현은 시대가 요구한 필요조건들이었다.

반대로 다게레오타입에서 안개처럼 흐린 이미지는 아주 드물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미지는 다게레오타입의 기술적인 문제에서 야기되는 실패한 이미지로 간주되었고 게다가 이러한 흐린 이미지는 "사회적 신분 상승을 함축하는 (초상)이미지를 요구하는 개인들(부르조아)에게 성공한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44) . 다게레오타입 이미지에서 나타난 흐린 현상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움직이는 대상이나 행위에 대한 자국 혹은 유령과 같이 사라지는 인간 존재의 자국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흐린 이미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촬영자의 의도가 아니며 오히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비록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움직이는 대상의 포착(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스냅사진")을 당시 촬영자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기술적인 문제에서 야기된 현상이다. 다게레오타입은 나무랄 수 없는 선명한 이미지로 대단한 성공을 가졌다. 선명한 이미지는 곧 성공한 다게레오타입 사진이며 당시 사람들은 현실의 충실한 복사 이미지로서 나타난 이러한 다게레오타입의 깨끗한 이미지에 절대적인 예술적 가치를 부여했다. 반대로 흐리게 나타난 이미지를 촬영자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예술적 표현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게레오타입의 환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도표 5 : Marc-Antoine Gaudin, 다게레오타입, 지름 7,2 cm, 1842
사진 뒤에 크레용으로 "오를레앙 공작 장례식"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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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19세기 사진 기록자에 의하면 다게르의 잠상에 관계하는 요오드 감광의 발견은 그가 자신의 실험실 화학약품통과 우연히 놓아둔 숫가락의 자국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차후 기록자들이 사진에 대한 인식과 기술적인 교육을 위해 인위적으로 꾸며진 사실로 간주된다. 사실상 다게르는 자신의 사진기술 사용법이외 어떠한 구체적인 내용을 남기지 않았다.
2)곧 거의 모든 은판은 크기별로 아예 시장에서 상품으로 나타는데 간혹 둥근판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사각판이다.
3)옥화은은 원래 물에 용해되지 않으며 밝은 노란색 가루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가열하면 수소요오드산(acide iodhydrique)과 또는 알카리 시안화물과 암모니아를 섞은 화합물에 용해된다. 또한 이것은 치아황산염(hyposulfites)에도 용해된다.
4)Michel Frizot, Nouvelle Histoire de la photographie, Bordas, Paris, 1994, p. 34.
5)Michel Frizot/Raymond Bellour/Giovanni Lista/Sylvain Roumette, Le temps d'un mouvement, col. Photo Copies, Centre National de la photographie, Paris, 1986, p. 7.
6)A.A. Gaudin/N.P. Lerebours, "Le Daguerréotype", 3ème édition, 1842, reimp., dans Le Daguerréotype, vol.II, Jean Michel Place, Paris, 1987, p. 20.
7)경석(ponce)을 사용할 경우에는 표면에 어떠한 자국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물기 없는 솜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치 않으면 이미지의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때 경석은 완전히 마르고 난 뒤 사용해야하고 경석은 아주 부드러운 것이어야 한다.
8)Ibid., p. 20.
9) Louis Figuir, La Photoographie, Texte et illustrations extraits du troisieme volume des Merveilles de la Sience(1888) avec le supplement de 1889, reimp., Laffitte Reprints, Marseille, 1983, p. 48.
10) Ibid..
11) E. de Valicourt, Nouveau manuel complet de Photographie sur metal, sur papier et verre, Manuels-Roret, Paris, 1851, reimp., Leonce Laget, Paris, 1977, Tome I, p.64.
12)Ibid.
13)Louis Figuier, op. cit., p. 47.
14)그러나 사진 사학자인 에데(Eder)에 의하면 최초의 활용자들은 사실상 클로데가 아니라 비엔느의 크라토치윌라(Kratochwila)와 나테레(Naterer)라고 언급하는데 그들의 활용법은 차후 1841년 1월과 3월에 출판된다. 또한 미국에서 고다르(Goddard) 역시 이미 1839년 12월에 이러한 활용으로 브롬을 언급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1840년 말경 최초의 가속 감광물의 활용자로서 클로데를 언급하는데 그때 그의 방식은 염화 요오드(chlorure d'iode)의 활용이었다. George Potonniée, Histoire de la decouverte de la photographie, Publications phtographiques et cinematographiques Paul Montel, Paris, 1925, reimp., Edition Jean-Michel Place, Paris, 1989, p. 220.
15)1840년에 나타난 많은 가속 화합물들 중 피조의 방식이 유일하게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인정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Ibid.
16) Ibid.
17)마크 앙투안 오귀스트 고뎅(Marc Antoine Augustin Gaudin 1804-1880)을 말하는데 그의 동생 알렉시 피에르 고뎅(Alexis Perre Gaudin 1818-1894) 역시 사진 연구자였다. 사진 연구자인 고뎅은 그의 동생과 함께 초상 사진 스투디오를 열었다. 원래 화학자였던 그는 화학 분야에서 그의 탁월한 연구와 업적으로 1867년 트레몽 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1880년 화학약품 중독으로 죽는다.
18)M.A.A. Gaudin / N.P. Lerebours, op. cit., p. 52.
19) Ibid.
20)이 사진으로 그는 1842년 국가 산업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산업 장려 협회 공모전에서 은메달을 수여 받았다.
21)여기서 "순간장면"이라는 당시 이론가들의 진술은 초 이하의 노출속도로 움직이는 대상에 대한 순간포착이라는 일반적인 개념과는 달리 단지 긴 노출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여진 시간에 의한 장면의 재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실상 시각적으로 정확히 보여주는 순간 장면을 보기 위해서는 네그르(C. Negre)나 르그레G. Le Gray) 사진의 경우처럼 유리판 콜로디온 프로세스의 출현(1851년)을 기다려야 한다.
22)Comptes rendus de l'Académie des Sciences, 1841, 1er semestre, p. 832, cité par George Potoniee, op. cit., p. 234.
23)Ibid.
24)Michel Frizot / Raymond Bellour /Giovanni Lista / Sylvain Roumette, op. cit., p. 8.
25)여기서 움직이는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완전히 열려진 조리개로 실행하는 촬영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렌즈의 심각한 수차들과 거의 잃어버린 심도로 안개와 같은 흐린 이미지를 감수해야 하는데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 사진적 가치는 절대적으로 이미지의 선명도에 있었다.
26)E. de Valicourt, op. cit., Tome I, pp. 87-88.
27)Ibid.
28)Ibid., p. 82
29)Louis Figuier, op. cit., Tome I, p. 82.
30)George Potonnier, op. cit., p. 234.
31)브롬은 프랑스 몽펠리에 발라르(Balart) 약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초기의 이름은 발견자에 의해 뮈리드(muride)라고 했지만 차후 귀 뤼삭은 이것을 브롬(brome, brômes, puanteur)이라고 명명했다. 브롬은 아주 위험한 독약이다.
32)M.A.A. Gaudin / N.P. Lerebours, op. cit., p. 29.
33)George Potonniée, op. cit., p. 224.
34)왜냐하면 비록 프랑스에서 출현했지만 당시 대다수의 이러한 렌즈는 독일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1841년 아라고에 의해 소개되고 네 개의 렌즈로 구성된 소위 "독일 렌즈"는 당시 초상사진 촬영을 위해 만들어 졌고 당시 큰 유행을 불러 일으켰다.
35)Louis Figuier, op. cit., p. 103.
36)E de Valicourt, op. cit., Tome I, p. 7.
37)Ibid., p. 8.
38)A.A. Gaudin / N.P. Lerebours, op. cit., p. 52. note
39)Dictionaire mondial de la photographie, Des origine a nos jours, Larousse, Paris, 1994, p. 255.
40)E. de Valicourt, op. cit., Tome I, p. 4.
41)같은 해 레르부르(Lerebours) 사진기라고 하는 또 다른 새로운 다게레오타입 사진기가 나오는데 이 사진기 역시 고뎅의 사진기와 유사한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 레르부르의 무수차 렌즈와 금속회전 막셔트가 장착되었고 사진판은 7 x 8 cm(약 1/8판)이었다.J.p. Francesch / M. Bovis / J. Bocher, Guide des apareils photographiques francais, Maeght Edition, Paris, 1993.
42)Francoise Heilbrun, Nouvelles acquisition, dans La revue du Musée d'Orsay, N˚4 printemps Publication Musée d'Orsay, Paris, 1997, p. 26
43)E. de Valicourt, op. cit,, Tome I, p. 11.
44)André Rouillé L'Empire de la photographie et pouvoir bourgeois 1839-1870, Le Sycomore, Paris, 1982, p. 41.  

이글은 마실가 홈페이지에서 옮겨왔습니다. 원본은
http://www.masilga.co.kr/photo/history/Existence/theme01.asp
입니다.

 

원본 출처는

 

서명/저자사항 : 사진과 포토그라피 = / 최인진... [等著].

기타서명 : 寫眞
Photography
한국사진의 역사와 사진이론에 관한 연구
최인진 선생 화갑기념논총

저자 : 최인진, 박청아, 허재우, 유지현, 박주석, 이경률, 최봉림, 이기명, 박평종, 진동선, 이경민, 최인진, 사토 히토시, 진신

발행사항 : 서울 : 눈빛, 2002

형태사항 : 399 p. : 圖, 年譜 ; 23 cm.

일반주기 : 參考文獻 收錄
한국사진의 기원에 관한 연구 / 최인진 -- 고종 황제의 초상사진에 관한 고찰 / 박청아 -- 최초의 사진교육기관 YMCA 사진과 / 허재우 -- 일제시대 '예술사진'의 개념과 예술사진가의 인식 / 유지현 -- 한국사진의 도입 과정과 정해창 사진의 해석에 나타난 문제점 고찰 / 박주석 -- 다게레오타입의 환상과 현실 / 이경률 -- 기계적 예술에서 사진예술로 / 최봉림 -- 사진의 분절에 관한 연구 / 이기명 -- 사진과 포토그라피 / 박평종 -- 시간의 살해 그리고 시간으로부터의 해방 / 진동선 -- 식민주의 담론의 재현 / 이경민 -- 조선중앙·동아일보의 일장기말소사건 / 최인진 -- 신낙균과 일본 사진계 / 사토 히토시 -- 낭정산과 그의 집금사진 연구 / 陳申.

DDC : 770.4 16

발행국 : 서울

언어 : 한국어

ISBN : 8974099233 93660

자료유형 : 도서

출판년 :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