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있는 영광갤러리에서 작년 3월에 열렸던 전시입니다.      시스템과 개인이 맞부딪는 접점을 거대 메카닉과 인간의 대비로 이미지화한 사진들입니다만, 사실 전 이 사진들에 대해 객관을 견지하며 설명을 써내려갈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내시경보다 여행을 싫어하는 제가 전시보러 부산까지 갔었고, 처음으로 구입하고 싶었던 사진들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사진으로 압도되어 버린 몇 안되는 케이스였기 때문입니다.    부산 한군데서 전시가 끝나버려서(제가 아는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가 어려웠다는 것이 전시에 대한 글쓰기가 힘든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아래에 작가의 글과 김혜원님의 글을 실어 놓았습니다.
사실, 많이 화가 나기도 합니다.      서울서 전시하지 않으면 리액션의 정도가 너무 많이 차이나는 것도  그렇고, 평론가들의 관심도도 너무 서울에 집중되어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평론하시는 분들도 지방에 있는 학교에서 강의하시면서 말이죠.쩝.

하우에서 2000년도에 'HUMAN REFINERY'라는 전시를 했었는데, 원래 어둠의 정원이 전작이라고 합니다.      하우에서의 전시를 보고 무언가 와 닿지가 않았다면, 이 시리즈를 같이 보시면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지성배님의 홈피에 가시면 다른 시리즈의 사진들과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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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zoomin.co.kr/community/upload/bbs/file/gs.zip
http://my.netian.com/~jiji44   <-  지성배님의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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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정원>은 지난 99년부터 2000년까지 2년에 걸친 작업의 결과다.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인간정제소>의 연작을 촬영하였고, <인간정제소>가 먼저 발표됐다.  그러나 나는 공단시리즈의 가장 첫 작업인 <어둠의 정원>에 애착이 간다.  기회를 엿보다 이번 기회에 발표하기로 맘먹었다.  

작업의 의도는 차가운 기계장치 속에서 부품으로 전락해 가는 왜소한 인간상의 구현이었다. 때문에 장치 곳곳에 나를 세웠고, 내가 서있는 위치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싶었다.



저 쏟아 놓은 불빛들이

모조리 방전될 때까지

몸부림치고 싶었다.

그 막춤에 혼절하고 싶었다.

허기진 배가 나를 부를 때

나는 어둠에 다시 부화되고 싶었다.

나는 나의 어머니이며 아버지이며 아들이고 싶었다.

득시글한 세균들의 아침이 오기 전

그 전율의 미명으로부터

멸균되어 푹, 쫘악 세상을 찢는

나방의 첫사랑이고 싶었다.

여섯 번의 허물을 벗고도

어여쁜 나비의 성충이 되지 못해 밤을 거처하는 삶

함부로 그 나방의 사랑이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태연히 벌거벗고

침묵에 발 담그듯

은입자로 서서히 박혀가는 시간 동안

현현(顯現)되는 나의 껍질들이 바람을 탄다.



이제 나는 아주 긴 시간을 기다려

그리움의 모서리에 콕 찍힌 작은 상처 하나를 간직하고 가는

저 나방의 상투적인 죽음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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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배가 인식한 모던 스페이스, 지성배가 바라본 공장이라는 공간은, 초기의 공장사진에서부터 「어둠의 정원」이나 「인간정제소」에 이르기까지 줄곧 정사각형의 프레임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가 바라본 공장의 이미지는 직사각형이나 파노라마 프레임을 거부하고 오로지 핫셀블라드 정사각형의 굳건한 틀에 갇혀있다. 모든 시각 예술에서 프레임이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머문 흔적이며, 세계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걸러진 공간이다. 따라서 정사각형 프레임이 갖는 시각적 긴장감은, 실은 그가 인식한 현실이나 그가 해석한 세계가 낳은 긴장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이근삼이 쓴 부조리극 「원고지」에서, 등장인물인 교수의 옷이나 소도구인 벽, 가구 등이 모두 정사각형의 원고지 무늬로 과장되어 있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 구획된 원고지의 정사각형 프레임은 기계적인 삶과 구속, 단절 의식이나 소외 의식, 연대감 상실이나 파편화 등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을 풍자하고 있다.

지성배는 자신의 노동 현장인 공장을, 자신이 피땀 흘려 일구고 가꾼 어둠 속의 정원을, 망루에 오른 파수꾼이 되어 전지적(全知的) 눈길로 조감하고 있다. 어둠 속 우람한 저유(貯油) 탱크는 기품 있고 튼실한 정원수, 종횡무진 교직하는 파이프는 오일이 흐르듯 수액이 흐르는 얽히고설킨 나뭇가지, 여기저기 작열하는 불빛은 불시에 화들짝 만개한 야화. 그는 자신의 정원에 가득한 그 밤꽃송이들이 뿜어내는 향기에 취해 나르시스적 도취 증세의 몸짓을 드러낸다.

그러나 「어둠의 정원」 속의 그는 거대한 장치에 비하면 너무나 왜소하다. 발광하는 불빛의 명도에 채여, 사실 그의 존재는 셀프 포트레이트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미미하다. 그런데도 그의 제복과 헬멧과 그의 두 손이 꼭꼭 끼고 있는 흰 장갑은, 그의 가슴에 달린 명찰과 더불어 「어둠의 정원」 곳곳에서 훈장처럼 빛난다. 그는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노동으로 점철된 괴로운 자신의 육신을 쇠십자가에 꽂고, 문명의 꽃등불, 자본의 꽃등불을 후광으로 삼고 홀로 서서 당당하다. 이 자아 도취적 제스처, 이 땅의 한 노동자의 초상이 지성배의 「어둠의 정원」이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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