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선씨의 '한장의 사진미학'에 나오기도 하는 작가의 사진입니다.    찬탄에 인색치 않은 평론가이지만, 쓰여진 것을 읽어 보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진동선씨와 같은 공감을 이룰 수 있는 시각이나 사진적 방법을 구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김병훈의 작업에서 쓰이는 툴과 진동선 평론가의 글쓰기와 닿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가늠해보면, 사진/글 이나 사진가/평론가 를 알아나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입니다.    
아래 글은 2000.9.16 에 '당신에게' 시리즈에 대해 쓰여진 글입니다.     하여, 지금의 김병훈씨 사진이나 표현과는-본일은 없습니다만-  다를 수 있음을 전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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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줌인에는 '당신에게'로 제목이 올려져 있다.     내가 알기론 '내겐 너무나 슬픈...'인데, 확실한 제목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작가의 글을 보면 '...저의 작업을 예술적 개념이 아닌 문화인류학적 시선으로 접근하기를 바라는...' 이라는 주문이 있으나 그렇게 사람들이 쉽게 들어줄 것같지는 않다.

   나의 지금 바로 전 작업지역중 하나가 동물원이라, 이 사진들의 촬영장소를 알고 있다.    심지어 촬영한 포인트를 찍을 수 있는 컷이 있을 정도지만, 이 사진들을 처음 봤을때 실제와 매우 다른 무드로 제작된 것을 보고 매우 놀란 기억이 있다.      다른 사이트에 가서 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윤정미의 동물원 사진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김병훈의 사진은 엄청난 손질이 가해진 프린트라 테이크만을 두고서 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현실에서 미미하게 흐르는 분위기(김병훈이 원하는)를 사진 프로세스를 가지고서 증폭시킨 능력은 분명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 분명 만든 사람의 예민한 감성이 어디에나 마킹이 되어있고 그 비주얼의 집중도가, 그가 원하는 이성적인 '문화인류학' 시선을 방해할 수 밖에 없다.      물론 감성과 이성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작업의 예는 셀 수 없이 많겠지만, 그것은 양자의 활동을 완벽히 콘트롤 한다는 전제하에서다.   그 밸런스를 콘트롤하지 않고 그냥 제 스스로 흘러가도록 놓아두는 것이 나을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경우가 '당신에게'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구본창의 '굿바이 파라다이스'도 같은 관점에서의 비슷한 대상을 다룬 사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회적 시점의 작업이 될 수 있음에도 구본창만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감성적 노선을 선택함으로 무리하지 않는 완성도를 이루었다.

  김병훈의 감성의 막강함은 '산책이 그리운 이유'라는 다른 시리즈의 사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노말한 프린트로 이뤄져 있는 이 시리즈는 그의 시선만 따지더라도, 그의 감성의 플러그가 어디에 on 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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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



당신에게


나의 가슴은 부끄러운 한 세기의 인간이 지녀야 하는 무겁고 어리석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아마도 지나가는 세기를 아쉬워하는 인간의 고민일 것입니다. 자꾸만 새로운 것들을 찾아 헤메이며 남게되는 인간의 퇴적물은 곧 지구를 덮기에 충분할 것이며 겹겹이 쌓이는 인간의 오만과 불안감은 고스란히 자연이 짊어지다 못해 이젠 그 짊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버렸습니다.  

언제 까지나 그들에게 응석을 부리며 그들의 가슴을 파헤쳐 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런 저런 문제로 고민을 하게된지 4년여 되었습니다.  처음엔 우리가 가져야 하는 부끄러움을 인식하지 못해 망설이고 모른 척 했지만 한 세기가 교체되는 지금의 이시기에 이 시공간의 힘에 압도 되어버렸습니다. 자꾸만 새로움과 지난것에 대해 자문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원하는 새로운 것을 얻으려 한다면 어느 부분의 희생이 따른다고, 새로운 것과 지난 것은 몇 몇의 인간들이 인식 못한 공간의 이미지로서의 다른 공간을 넘나들며 바라봄과 그 존재의 인식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이런 나에게 새로움과 세상사람들의 새로움의 차이에선 어떤 매개가 있을까요. 공간은 어떻게 인식되고 규정지어 지는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지금 당장 순간 순간을 인식할 수 있을지도 의문 투성이죠.   새로움은 시공간에서 이전에 느끼지 못한 사물에 대한 개인의 학습적 기회일 것입니다.
  
또, 누군가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작업은 새롭지 않지만 독특하고 재미있는 방식이군요...."  
지금 저의 작업은 새롭지 않지만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의 시간과 공간에서의 대상에 대한 정직함과 진실함을 찾기 위한 실험의 연속입니다.   지금은 당신이 저의 작업을 예술적 개념이 아닌 문화인류학적 시선으로 접근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늘 동물원에서 그림책에서 익숙한 대상을 접한다 // 새롭지 않다 // 내 개인적인 관점의 문제이다 // 문제는 심각하다 // 어디서부터 구멍난 공간을 메워야 할지 모르겠다 // 이 공간과 대상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갈 것이다 // 희생이다 // 인간을 위한 학습의 목적이라는 미명아래 희생을 감수하는 자연이 보여진다 //

100년 전 한 세기를 보내고 받아들이려는 문학인 이상, 그가 느끼던 의식과 현실에서의 갈등에의한 절망, 대중이라는 개념으로 비개성적 익명 화된 자아의 존재의식을 찾으려는 문제를 끝내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1996년 12월 24일